잊힌 역사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동우

“철들지 않는 한, 나는 늘 청년이다”

평범한 직장인에서 여행작가로, 다시 기업 홍보 담당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사진작가 김동우는 종잡을 수 없는 이력을 자랑한다. 

나이 마흔에 비로소 자신의 평생 ‘업’을 찾았다는 그를 만나 아직도 청년으로 살아가고 있는 동력을 물었다.


20대 때는 타는 젊음과 끓는 피로 세상에 정의를 알리는 언론인을 꿈꿨다. 그러나 막상 사회에 나가 마주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눈에 핏발을 세워가며 쓴 기사가 광고에 밀려 허무하게 사라지는 상황에서 문득 ‘여기에 내 삶의 행복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1년간 세계 여행을 떠났다. 무작정 떠난 여행에서 그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만남을 갖는다. 인도 레드 포트(Red Fort)에서 생각지도 못한 우리 선조들의 흔적을 발견한 것. 전율을 느끼며 홀린 듯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따라가던 그는 이 일이 평생을 바칠 일이라고 직감했다. 이후 1년 8개월간 세계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가의 흔적과 후손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사진가로는 처음으로 국가보훈처의 ‘보훈문화상’을 받았다.

Profile 김동우 •1978년생(45세)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뭉우리돌의 바다> 저자


사회 첫 출발이 기자였나?

막상 기자가 됐는데, 힘들게 취재해서 쓴 기사를 윗선에서 광고와 바꿔버리는 꼴을 보고 기가 막혔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이렇게 사는 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행복하려고 사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행복이 회사에는 없었다. 계속 다닐지 말지 선택을 해야 했다. 주위를 봐도 대부분 여기까지는 고민을 하지만 막상 결단을 못 내리고 있는데, 난 내렸다. 결론은, 용기를 낸 만큼 행복해지는 것 같다.


퇴사 경력이 화려하던데?

기자 생활을 할 때도 문학적 글쓰기에 대한 욕구가 컸다. 그래서 퇴근 후나 휴일 등 시간을 쪼개 따로 글쓰기 공부를 했다. 대학 때부터 기자 생활을 할 때까지 10여 년간 글을 썼더니 ‘책 한 권 쓸 능력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배낭 하나 메고, 카메라 하나 들고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첫 여행의 콘셉트는 ‘세계의 명산’이었다. 킬리만자로에도 올라보고,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기도 하는 등 그렇게 1년 여행의 다양한 경험을 엮어 <트레킹으로 지구 한 바퀴>(지식공간)라는 책도 냈다. 돌아오니 먹고살 길이 막막하더라. 퇴직금은 다썼고…. 그래서 취업한 곳이 수협중앙회 홍보실이었다. 주 3일 내근에 2~3일은 출장이었다. 국내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그곳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일을 했는데, 내 입장에서는 완전 ‘꿀보직’ 이었다. 게다가 ‘칼퇴’가 가능한 곳이라 여가 시간을 이용해 사진 공부, 글쓰기 공부를 하며 두 번째 책<걷다 보니 남미였어>(지식공간)도 낼 수 있었다.


사진작가의 길로 들어선 이유는?

회사를 잘 다니다가 문득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차피 할 거면 제대로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집도 팔았다. ‘지구 한 바퀴를 돌며 다큐멘터리 사진을 해보자’는 막연한 계획만 갖고 시작한 여행이었다. 주제도 없이 일단은 ‘질러놓고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독립운동’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찾은 건가?

인도 뉴델리의 레드 포트에 갔는데, 알고 보니 거기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소속 ‘인면전구공작대’와 영국군이 함께 훈련하던 장소였다. 9명으로이뤄진 인면전구공작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요청한 광복군이었다. 임정은 이들을 통해 참전국 지위를 얻고 싶어 했다. 그 사실을 발견한 순간 소름이 돋았다.

멕시코, 독립운동가 김익주의 후손 다빗 킴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텐데…

시작할 때 “왜 지금껏 이 작업을 한 작가가 없었을까?” 생각했다. 시작 하고 나서야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전 세계 방대한 지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흔적을 다 찾아보려니 경제적 문제와 언어 장벽을 해결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비를 들여야 했고, 한 지역에 갈 때마다 통역을 구해야 했다. 그뿐 아니라 이제는 당시 모습이 다 사라져버린 황량한 풍경에서 역사의 순간을 표현해내는 건 사진 기술만으로는 불가능했다. 내가 취재한 경험, 글 쓴 경험, 사진 작업을 했던 경험이 하나로 응축된 작업이어야 했다. 그래서 애당초 결과물을 낼 때도 사진집에 이어 텍스트 북을 낼 생각도 했던 거다.


‘뭉우리돌’의 의미가 뭔가?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독립운동 정신의 상징으로 나온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선생에게 일본 순사가 “지주가 전답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은 당연 한 일이 아니냐!”라고 하자 선생이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라고 답한다. 책 제목은 전 세계 곳곳에 뭉우리돌처럼 박혀 대한 독립을 위해 생을 바친 그분들을 기리며 지은 것이다.


집을 파는 데 아내도 동의한 건가?

아내도 기자 출신이다. “너도 한 8~9년 하지 않았냐. 숨차지 않아? 그러니 좀 쉬는 게 어때?” 하고 꼬셨다.(웃음) 처음에는 같이 길을 떠났다. 그런데 아내가 장기 여행을 힘들어해 중간에 귀국하는 바람에 결국 본격적 작업은 혼자 해내야 했다. 


역사의 숨결을 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현장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실체적으로 구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수였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는 너무나 방대하고 등장하는인물과 조직이 너무 많다. 인물의 개인적 역사와 시대적 배경, 지리적 배경을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현장의 진정한 의미를 전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작가에게는 ‘지표성’, 즉 그 현장에 섰다는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 현장에 서서 셔터 한 번 누르고 오는 게 다큐멘터리 작가는 아니다. 현장의 의미와 역사를 꿰찬 다음 그 자리에 서야 오롯이 의미를 느낄 수 있다. 그 선행 작업이 이뤄진 후에야 ‘여기는 이렇게 표현해야겠다’라는 판단이 선다.


라이카 카메라를 쓰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카메라와 렌즈가 작아서다. 장기간 취재를 다니다 보면 장비가 짐이니까.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찍는데 캐논이나 니콘 등 일제 카메라를 썼다면 ‘모양’ 빠질 뻔했다.(웃음) 


작업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사람들이 내 전시나 책을 보고 “진짜 몰랐던 역사예요”라고 얘기해줄 때다. 사실 그것 때문에 하는 거니까. 이 작업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사명감이 생겼다.

쿠바 카르데다스, 독립운동가 이윤상의 딸 레오노르이 박


“이제는 사명감이다. 때로는 마음이 아파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 먹먹한 역사를 누가 알까? 누가 여기를 찾아줄까? 그런 생각이 들면 나라도 이걸 찍어서 보여주지 않으면 그분들의 눈물이 잊혀질 것 같다. 모르겠다.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런 마음가짐이 지금까지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 같다.”


반대로 슬펐던 기억이 있다면

2021년은 자유시 참변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21년 시베리아 한복판 ‘자유시’라는 곳에서 독립군 몇백 명이 희생된 비극적 사건이다. 현재 그 도시에 가면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지 않길’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 남북으로 갈라져 반세기 이상 지나오지 않았나.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가 제일 낙담한 일이 바로 분단이 된 것”이었다. 러시아에서도, 멕시코에서도, 쿠바에서도 그 얘기를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비석을 보는데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더라.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의 삶은 어떤가?

가난하지만 행복하다.(웃음) 다큐멘터리 작가 중에는 사적 영역에 들어가 사적 다큐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것을 미학적으로 구성해 잘팔리는 사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아내한테 손 안 벌릴 정도로 최소한의 생활비만 벌고 있지만, 작업할 때는 더없는 보람과 행복을 느낀다.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가 중요한 시기 아닌가?

각자 생각하는 삶의 가치가 다를 뿐이다. 결코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는 문제다. 한쪽에서 다른 쪽을 바라봤을 때 “넌 틀렸다”라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의 삶의 가치가 경제적인 부분에 있다면, 그대로 살면 된다. 그 가치를 이루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다. 다만 나의 가치는 그쪽에 있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경제적 가치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나는 나와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을 존중한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 이런 감춰진 이야기가 사회에 알려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스스로 중년이라고 자각하고 있나?

아닌 것 같다. 공자가 ‘불혹(不惑)’을 얘기했는데, 일리가 있다고 본다. 그렇게 따지면 요즘은 한 60세 정도는 돼야 중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난 그 나이가 돼도 여전히 중년이라고 자각하긴 힘들 것 같다.(웃음)


젊게 사는 원동력은?

사람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멈춰 있으면 늙는다. 젊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신적인 젊음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적 젊음이다. 육체적 젊음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정신은 절대 그렇지 않다. 철들지 말아야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다.


앞으로의 계획은?

원래 쿠바 이민 100주년을 맞아 그곳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취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 때문에 연기한 상태다. 대신 국내에서 하려는 작업이 있는데, 이건 아직 외부에 밝히기가 곤란하다.



Den 160호 <잊힌 역사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동우>

에디터 김구용, 포토그래퍼 김동오, 사진제공 김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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