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무색하고 직책은 의미 없는 시대를 백세까지 살아야 한다. 빅데이터 전문가이자, '시대예보' 시리즈의 저자 송길영 작가는 이 변화를 '호명 사회'라 지칭한다.
직책이나 나이 등 구시대적 기준을 내려놓고, 개개인의 정체성을 갖춰 서로를 이름으로만 부르는 시대. 송길영 작가는 '호명사회'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시대예보를 선언했다. 그러나 직장과 가족에 모든 걸 희생한 중년에게, 이름 세 글자는 유독 앙상하다. 살아온 만큼 더 살아야 하지만 살아온 것처럼 그대로 살아갈 수 없는 중년에게, 송길영 작가는 따뜻한 경고와 차가운 위로를 전한다.
송길영
· 작가
1부에 이어..
직책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 시대, <시대예보: 호명사회> 송길영 작가 ①
앞으로의 시대가 중장년층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은퇴 이후, 새로운 시도를 하기 전에 전문성을 축적하는 시간을 보내는 게 좋다. 'Easy come, easy go.’는 영미권 속담처럼, 결과만 기대하고 쉽게 결정하면 오래가기 어렵다. 은퇴 이후에, 쉽고 돈이 된다는 얘기에 생전 관계없던 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때문에 지식이나 경험 등 한 분야에 대한 자산을 축적하고, 이를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드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또한 사양산업은 피하는 것이 좋다. 사양산업과 관련한 축적이라면 결국은 새로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유망산업과 사양산업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나?
로봇과 AI가 할 수 있는 산업은 하면 안 된다. 이들은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3교대 직업을 혼자 수행하고, 노조에 가입하지 않는다. '근면'이 주요 역량으로 꼽히는 산업은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창의력을 요하거나 더 깊은 사고를 기본으로 하는 산업은 남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엔 AI의 창의성도 주목받지 않나? 창의성을 요하는 직업도 위협받지 않을까?
이젠 AI로부터 완전무결한 직업은 없다. 인간이 어느 정도의 영역을 갖고, AI가 어느 정도의 영역을 갖는지 정도만 다를 뿐이다.
근면의 가치하락을 꼽는 셈이다. 앞서 경험과 전문성을 쌓아야 한다고 말한 것을 고려하면 근면이 강점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닌가?
생각 없는 근면이 문제인 거다. '그냥' 열심히 하는 건 재앙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발견하고, 방향성을 정하면 스스로 즐기면서 열심히 배우게 된다.
전문 영역이 필요한 시대에서, 이미 전문성을 갖춘 전문직 종사자들은 어떤 방향성을 지향해야 할까?
최근 전문성의 특징은 범주가 넓어지고, 전문성을 전달하는 행위를 넘어 전문 지식을 설명하는 모습이 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본인이 가진 전문성을 기반으로 혜택의 범주를 넓히는 게 좋다. 의사라면 과거에는 환자와 대면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정도였다. 요즘은 본인이 머무는 지역을 넘어 전국, 해외까지 영역이 넓어졌다. 유튜브와 강연 플랫폼이 많아지면서 전문성의 대상이 일반 대중까지 향한다. 삶의 범주가 확장된다는 측면에선 기쁜 일이다.
직업 자체로 전문성을 갖춘 사람들이 조직에서 나와 개인으로 활동한다. 이러한 현상이 사회에 어떤 의미로 작용할까?
표면적인 정보가 아닌, 섬세한 전문성이 민들레 홀씨처럼 사회에 퍼져나가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과거엔 환자가 담당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면 일단 병원에 진료를 의뢰해야 했다. 미디어 측면에서 협업하고 싶다면 기관 대 기관으로써 협조전과 공문 처리를 해야 했다.
지금은 전문의의 개인 유튜브나 SNS로 직접 소통할 수 있다. 전문가 개개인의 팬덤이 생기면서 오히려 조직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도 있다. '충주맨'이 인기를 끌면서 충주시 자체가 알려진 것과 같다. 옛날에는 조직이 먼저 나오고 개인이 그 뒤로 따라오는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개인이 먼저 드러나고 조직이 따라오는 경우가 많다.
조직보다 이름이 앞서는, 말 그대로 '호명사회'다
조직 입장에서도 수혜를 입는다. 개인이 이름을 알리면서 조직의 고객과 밀접한 관계를 성립할 수 있고, 그만큼 유의미한 홍보 효과로 작용한다.
개인입장에선 조직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조직이라는 큰 모선에서 이젠 필요시 쓸 수 있는 든든한 구명 보드가 만들어진 셈이다.
개인이 자유를 얻는 동시에, 조직에서 느낄 수 있는 안락함은 잃은 건 아닌가?
선택지가 생긴 거다. 누군가는 조직에서 활동하는 걸 선호하고, 누군가는 개인으로 활동하길 선호한다. 과거에는 조직에 속해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었지만, 지금은 개개인에게 선택지가 주어졌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나아지고 있는 셈이다.
중년이 정점이자 끝이 아니라,
그 다음 스테이지를 위한 출발점이라고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려면 스스로 중년이라는 생각을 잊어야 한다.
부양가족이 있는 중년 가장에겐 개인으로 사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중요한 건 내가 부양을 위한 도구로 태어난 것은 아니라는 각성이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다보면 어느 순간엔 그것이 내 운명처럼 느껴지지 않나. 그것을 혼자 짊어지고 사는 건 건강하지 않은 것 같다.
본인 스스로 왜 가족을 부양하는 생각하고, 그 다음은 가족을 대상으로 나의 노력을 인지할 수 있도록 알려줘야 한다. 가족 구성원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고, 그게 아니면 최소한 고마움이라도 갖게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의 삶이다. 본인의 삶을 제거하고 누군가의 삶을 위한 도구로 사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다. 그건 옳지 않다.
가장의 입장에선 심금을 울리는 위로일 것 같다
시대가 그래왔으니 당연하게 여긴 것도 있다. 이제는 이러한 불일치를 없애려는 시도와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합의해 나가야 할 숙제다.
중년의 입장에선 새로운 시작 자체가 두렵다.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중년에게 조언이 있다면?
남의 얘기를 듣지 말고 본인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본인의 꿈이 진정 본인이 생각한 꿈이 맞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본인이 꿈이나 로망으로 여기는 것이 관행일 수도 있다.
최근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50대 중반에 들어선 분들이 체력을 키워서 히말라야에 간다고 하더라. 실천의 의지가 대단하고 생각해서 가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서로 '이 친구가 가자고 했다'며 책임을 떠넘기면서 이유를 만들더라. 이 경우는 그야말로 타인의 욕망을 따라가는 거다. 타인의 목소리가 아닌, 내 마음 속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야 오롯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있다.
